야마모토 사쿠베 씨와 탄갱 기록화
탄갱의 재해

가스 폭발, 낙반 등의 재해로 고심한 광부들

재해에 대한 공포심과 싸우면서 채굴하고 있었습니다

탄광 재해에 희생된 사람의 숫자는 전국적으로 약 5만명(지쿠호 지역에서는 약 2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탄광은 물과 가스와의 싸움이었다 라고 하는 것처럼 탄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깜깜한 지하에서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재해에 대한 공포와 싸우면서 석탄을 채굴하고 있었습니다.

메이지, 다이쇼경에는 아직 비교적 얕은 곳의 채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스 폭발, 낙반, 갱내 출수, 갱내 화재 등의 재해에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쇼와가 되자 기계화가 눈부시고 보안 의식도 점차 높아져 보안 기기도 여러가지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채굴의 집약, 대형화와 심부 채굴 또한 전쟁에 의한 증산 운동 등에 의해 출탄량은 증가했지만, 반면 재해도 적지 않았습니다.

지쿠호 탄전에서 사망자 100 명 이상인 중대 재해를 살펴보면, 메이지 32년, 40년에 이토다마치 호코쿠 탄광에서 각각 215명, 365명, 마찬가지로 40년에 구라테군미야타마치, 가이지마오노우라에서 259명, 다이쇼 3년에는 호조마치, 미쓰비시호조에서 686명(일본 광업계 최대의 참사), 6년에는 미야타마치, 가이지마키리노에서 369명, 쇼와 40년에는 가호군이나쓰키마치, 미쓰이야마노에서 237명이었습니다. 모두 가스 폭발에 의한 것입니다.

폭풍에 날려가는 갱부

가스 폭발 사고의 무서움을 『미쓰비시호조광산사』에서 보면, 폭발과 동시에 입기, 배기의 양쪽 갱으로부터 검은 연기가 소용돌이치며 분출하고 승강용 케이지는 15미터나 날아갔으며, 갱구에 있는 승강대의 천장에 부딪쳐 산산조각 부서졌다고 합니다. 희생된 사람의 시신은 타고, 피부가 그을렸으며 지상에서도 갱구에서 약 200미터 이내를 걷고 있던 사람은 쓰러질 정도였으며, 폭발 소리는 약 6km 떨어진 곳까지 울렸다고 합니다.

당시의 탄갱은 부부의 갱내 맞벌이가 많았기 때문에, 백 수십 명의 재해 고아가 생겼습니다. 이를 계기로 회사나 갱부들에게 보안 지식을 가지게 하고자 지쿠호 석탄광업조합이 노가타에 안전등 연구장을 만들고 조직적으로 보안 연구를 개시한 것이 다이쇼 4년 5월입니다.

이런 상황하에서의 노동이었기 때문에 탄갱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신앙심이 깊어져간 것입니다.

탄광 생활을 그린 1매  봉오도리 춤
쌀 소동(다이쇼 7년) 직후의 봉오도리 춤을 추는 모습입니다. 군대의 출동에 의해 소동은 결착되었지만, 아직 10명 이상의 집합이 금지되었던 시기였습니다. 봉오도리 춤도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금지되었습니다. 부채춤으로 분위기가 무르익기는 하지만, 경관의 모습이 보이면 바로 도망칠 수 있는 자세의 엉거주춤한 춤이었습니다.